1. 셔터 소리와 기다림의 미학
20대 시절, 나는 중고로 산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불편함이 오히려 설레었다. 한 롤에 36장.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셔터를 누를 때마다 신중했다. "이 장면이 정말 기록할 가치가 있나?" 스스로에게 물었고, 확신이 서면 그제야 셔터를 눌렀다.
한 롤을 다 찍고 현상소에 맡긴 뒤 며칠을 기다려야만 결과를 볼 수 있었다. 학교 앞 작은 사진관 아저씨는 늘 "3일 뒤에 오세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 3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혹시 빛이 새어 들어가 전부 망친 건 아닐까, 초점이 나간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장면들이 담겨 있을지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사진이 나오는 날, 봉투를 열며 느끼던 두근거림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어떤 사진은 흔들렸고, 어떤 사진은 빛이 과하게 들어가 망쳤지만, 그조차도 내 기록의 일부였다. 삭제 버튼이 없으니, 실패한 사진도 그대로 앨범에 꽂아 뒀다. 나중에 보면 "아, 이때 이랬지" 하며 웃을 수 있는 기억이 되었다.
그때는 '잘 나온 사진'보다 '그 순간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증거가 더 중요했다.
50대가 된 지금, 그 시절 사진들을 꺼내 보면 필름의 입자감 속에 나의 젊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조금은 서툴고, 촌스럽게 찍은 사진들에서 오히려 삶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기록들.
2. 스마트폰 시대, 즉시성과 선택의 시대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셔터 소리는 기계음일 뿐이고, 아예 소리를 끌 수도 있다. 결과는 1초도 안 되어 화면에 뜬다.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삭제하고 다시 찍을 수 있다. 같은 장면을 다섯 번, 열 번 찍어서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고른다. 수백 장, 수천 장을 찍어도 저장 공간만 허락한다면 문제없다.
이 변화는 편리함 그 자체다. 여행지에서 가족과 찍은 사진을 바로 SNS에 올려 친척이나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다. 아이의 웃음을 놓치지 않고 바로 담을 수 있고, 부모님의 생신 자리도 영상으로 기록해 두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다. 하지만 편리함만큼 고민도 생겼다. 사진이 너무 많아졌다. 하루만 지나도 수십 장의 사진이 쌓이고, 일주일이면 수백 장이 된다. 나중에는 어떤 것이 중요한지조차 헷갈린다. 갤러리를 스크롤하다 보면, 비슷한 각도의 음식 사진이 열 장씩 있고, 어디서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풍경 사진들이 가득하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한 컷을 찍기 위해 신중히 앵글을 잡았는데, 지금은 '찍고 보자'가 습관이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기록이 풍성해졌지만, 오히려 기억의 무게가 가벼워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너무 많은 사진은 때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다. 찍는 순간에 집중하기보다, 나중에 보여주기 위해 찍는 것 같은 느낌.
최근에는 사진 정리에도 시간을 쓴다. 매달 말, 그달의 사진을 훑어보며 정말 남기고 싶은 사진만 별도 폴더에 옮긴다. 그렇게 선별한 사진은 한 달에 30~40장 정도. 나머지는 과감히 지운다. 그래야 나중에 다시 볼 때 의미 있는 기억만 남는다.
3. 기록의 의미가 달라졌다
필름 카메라로 찍던 시절, 사진은 '기록을 남기는 일'보다 '순간을 간직하는 의식'에 가까웠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는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마음속에 새겼다. 카메라를 들어 올리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누르는 그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사진은 그 다짐을 담는 매개였다.
반면 스마트폰 시대의 사진은 '기억의 증거물'에서 '소통의 언어'로 변했다. 나 혼자 간직하기보다,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한 용도가 더 많아졌다. SNS에 올린 사진은 '내가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표현이고, 좋아요와 댓글은 그 순간을 타인과 함께 기억하는 방식이다.
친구가 새로 문을 연 카페 사진을 올리면, 나도 가보고 싶다는 댓글을 단다. 동료가 주말 산행 사진을 공유하면, 그 등산로 정보를 물어본다. 사진은 이제 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필름 시대의 앨범은 특별한 날에만 꺼내 보는 것이었다면, 스마트폰 사진은 일상의 연속된 대화다.
50대가 되어 돌아보니, 두 방식 다 의미가 있다. 필름은 '나와의 대화'였다면, 스마트폰은 '타인과의 대화'다. 나 혼자만의 기록이던 것이, 이제는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록이 된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시대가 달라졌고, 내가 속한 관계망이 달라졌으며, 기록의 목적도 달라졌을 뿐이다.
4. 다시 꺼내 보는 사진, 다시 꺼내 보는 나
얼마 전, 오래된 필름 앨범을 정리하다가 20대의 나를 마주했다. 대학 축제 날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흐릿한 배경 속에 선명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때의 웃음과 눈빛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옷차림도, 헤어스타일도 지금 보면 우습지만, 그 시절의 유행이었고 나는 그걸 즐기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그 시절의 감정까지 다시 꺼내 들었다. 필름 사진에는 그날의 공기까지 담겨 있는 것 같다.
스마트폰 사진은 다르다. 바로바로 열람이 가능하고, 필터로 보정된 얼굴은 늘 비슷하다. 완벽한 구도와 색감이 담겼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어느 장소였는지 가끔 헷갈린다. "이 카페가 어디였더라?", "이 사진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기억이 흐릿해진다.
대신 그 사진을 공유했던 친구의 댓글, 그때 주고받은 대화가 기록을 채워준다. "우리 또 가자", "다음엔 내가 살게" 같은 짧은 말들이 사진 아래 달려 있고, 그 말들이 맥락을 만들어준다. 사진은 장면만이 아니라 관계의 흔적이 되어 있다.
둘 다 소중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필름 사진은 과거의 나를 정직하게 보여주고, 스마트폰 사진은 현재의 내가 어떤 관계 속에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
5. 두 가지 기록법, 두 가지 위로
50대의 나에게 기록은 과시가 아니라 위로다. 필름은 '과거의 나'를 다시 불러오는 위로이고, 스마트폰은 '지금의 나'를 확인하게 해주는 위로다. 결국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담으려 했는가, 어떤 마음으로 기록했는가이다.
요즘 나는 두 가지 습관을 함께 가져가려 한다. 하나는 '천천히 찍기'다. 스마트폰으로 찍을 때도, 필름 카메라를 쓰듯 신중하게 한 장을 고른다. 연사 기능을 끄고, 프레임을 천천히 잡는다. "이 순간이 정말 기록할 가치가 있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른 하나는 '정기적으로 돌아보기'다. 매달 말, 그달의 사진을 훑어보며 짧은 메모를 남긴다. 나중에 이 메모들이 사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앞으로도 나는 두 가지 방식을 함께 가져가려 한다.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쳐 준 필름과, 즉시성을 통해 관계를 이어주는 스마트폰. 두 세계가 함께 있을 때, 나의 기록은 더 풍성해지고, 나의 인생은 더 다채롭게 기억될 것이다.
때로는 오래된 앨범을 꺼내 과거의 나를 만나고, 때로는 스마트폰을 열어 오늘 나와 함께한 사람들을 확인한다.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온전한 나의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