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속 의상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캐릭터의 세계관과 서사를 입체로 만드는 언어다. 시대를 호흡하는 소재, 움직임을 설계한 실루엣, 색의 대비로 만든 감정선까지. 아래 다섯 편은 ‘패션’이 이야기의 힘이 되는 대표적인 한국영화들이다. 배우와 주인공의 이름, 인상적인 장면, 그리고 왜 그 옷이어야 했는지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1. 1930년대의 결을 재단하다 — <아가씨(The Handmaiden)> (박찬욱, 2016)
주인공은 두 사람, 상속녀 히데코(김민희)와 하녀 숙희(김태리). 한 지붕 아래 권력과 욕망이 교차하는 이 작품에서 의상은 계급·문화·성역할을 시각적으로 번역한다. 히데코의 서양식 드레스와 일본식 기모노, 숙희의 조심스러운 한복과 기능적인 작업복은 한 장면 안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레이스·새틴·진주가 만드는 부드러운 광택은 인물의 표정과 함께 미세한 심리 변화를 증폭시키고, 허리를 강조한 실루엣은 통제와 해방의 양가성을 상징한다. 마당을 가르는 히데코의 흰 장갑, 서가의 어둠 속 푸른 실크 러플은 서사의 긴장과 감각을 동시에 붙잡는다.
패션 포인트 : 서양과 동양, 상류와 하층,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의상 레이어로 겹쳐지며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권력을 시각화한다. 한 벌씩 겹쳐 벗겨지는 의상 구조는 인물 관계의 반전들과 정교하게 호흡한다.
2. 연방(鍊棒) 대신 트렌치 — <암살(Assassination)> (최동훈, 2015)
1930년대 경성·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스나이퍼 안옥윤(전지현)의 트렌치코트와 펠트 페도라는 곧 ‘전투복’이다.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코트 자락은 움직임에 리듬을, 허리 벨트·견장·버클은 임무의 긴장감을 더한다. 독립군 동료들의 밀착 구성은 모직·가죽·면 등 소재 대비로 각자의 캐릭터가 구분되고, 카키·차콜·샌드 컬러 팔레트는 당시 도시의 먼지빛 공기와 시대의 질감을 담는다. 사격 자세로 들어갈 때 코트가 살짝 젖혀지며 드러나는 탄대·장갑·부츠는 실용성과 미장센을 동시에 증명한다.
패션 포인트 : 트렌치·페도라·투웨이 부츠는 ‘미션 전개—잠입—탈주’의 동선을 고려한 실용 설계. 전선의 냄새를 입힌 질감과 색이 장르적 쾌감(첩보·누아르)을 품격 있게 이끈다.
3. 범죄의 글래머 — <도둑들(The Thieves)> (최동훈, 2012)
팀 리더 뽀빠이(이정재), 로프 액션의 예니콜(전지현), 금고 장인의 펩시(김혜수). 마카오 카지노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의상은 ‘기능’과 ‘쇼’의 완벽한 타협이다. 예니콜의 점프슈트·바디수트는 와이어 액션을 계산해 재단했고, 펩시의 칵테일 드레스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시퀀·새틴으로 목표물의 시선을 끄는 장치가 된다. 컬러는 블랙·메탈릭·버건디·샴페인 톤으로 통일감을 주되, 실루엣·절개선·주얼리로 캐릭터가 구분된다. ‘팀’으로 움직일 때 화면에 생기는 광택의 층위는 곧 한탕의 박자를 맞춘다.
패션 포인트 : 슬릭한 이브닝웨어와 하네스·와이어 장비의 미묘한 공존. 하이힐의 각도, 이어링의 길이, 글리터의 입자감까지 액션 동선에 맞춘 ‘정밀 글래머’다.
4. 수트가 말하는 권력 — <신세계(New World)> (박훈정, 2013)
언더커버 형사 이자성(이정재), 정보기관의 강과장(최민식), 카리스마 넘치는 중간 보스 정청(황정민). 이 영화에서 수트는 ‘권력의 언어’다. 더블 브레스트의 묵직함, 라펠 폭과 V존 길이, 셔츠 칼라의 각도, 심지 두께가 인물의 서열과 성격을 은밀하게 이력서처럼 보여준다. 정청의 유려한 실루엣과 광택은 과시와 유머의 결이고, 강과장의 무채색 톤온톤은 통제와 냉혹을 상징한다. 스카프·타이 바·포켓 스퀘어의 미세한 변주만으로도 장면의 공기가 달라진다.
패션 포인트 : ‘핏’이 곧 태도. 어깨 라인의 구조·허리의 억제·바짓단 브레이크의 길이까지 화면비(2.35:1)의 수직 미학과 정교하게 맞물린다. 수트가 캐릭터의 윤리를 말한다.
5. 1990년대의 촉감 — <건축학개론(Architecture 101)> (이용주, 2012)
과거 파트의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은 1990년대 대학가의 공기를 입고 산다. 오버사이즈 셔츠, 라이트 워시 청바지, 로고 스웨트셔츠, 백팩·워크맨 같은 소품은 ‘첫사랑’의 기억을 촉각으로 불러낸다. 야외 강의실의 트레이닝 셋업, 스튜디오의 체크 셔츠, 비 내리는 날의 바람막이 재킷까지—편안한 실루엣과 소프트한 원단은 서툰 마음과 정확히 박자를 맞춘다. 현재 파트의 모던한 니트·코트는 서연(한가인)의 성숙을 보여 주며, 재회 장면에서 과거와 현재의 스타일이 교차 편집처럼 공명한다.
패션 포인트 : 90s 뉴트럴 팔레트(크림·네이비·그레이)와 자연광이 만나 복고가 아닌 ‘지금의 감성’으로 환승된다. 소품(카세트·공중전화·포스터)의 질감이 옷의 재질과 대화하며 추억을 현재형으로 번역한다.
6. 엔딩 노트 — 옷은 장면을, 장면은 기억을 만든다
<아가씨>의 레이어, <암살>의 트렌치, <도둑들>의 글래머, <신세계>의 수트, <건축학개론>의 90s 캐주얼. 다섯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시대와 장르를 입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의상=캐릭터’ 공식을 증명한다. 옷은 대사보다 먼저 등장해 인물을 설명하고, 액션보다 오래 남아 장면을 기억하게 한다. 다음에 영화를 볼 때는 스토리의 앞에 서 있는 칼라·단추·주름의 결부터 살펴보자. 그 작은 디테일들이 인물에게 어떤 비밀을 입혀두었는지, 아마 곧바로 감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