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책장을 펼쳤을 때, 달라진 문장들
나이가 들수록 같은 책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젊었을 땐 그저 멋진 문장으로만 스쳐 지나갔던 구절이, 지금은 내 마음의 오랜 상처에 다가와 위로를 건넨다.
20대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나에게 '성장'의 상징이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당위, 스스로를 깨뜨려 나가야 한다는 당찬 선언처럼 다가왔다. 그 시절 나는 책의 모든 문장을 미래를 향한 도전으로 읽었다. 뭔가 큰 일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평범하게 살면 안 된다는 강박이 그 책을 통해 더 단단해졌다.
그런데 50대가 된 지금 다시 읽으니, 그것은 고독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고백으로 읽힌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문장은 더 이상 젊음의 혁명만이 아니라, 인생의 중반에 또 한 번 껍질을 깨야 하는 순간을 준비하라는 속삭임 같다.
이미 구축한 삶의 틀, 익숙한 역할, 안정적인 루틴. 그것이 때로는 나를 보호하는 껍질이지만, 동시에 성장을 막는 감옥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 50대에 읽는 <데미안>은 그런 양가감정을 고스란히 건드린다.
2. <데미안> — 나를 다시 부르는 질문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착한 아들로, 모범적인 학생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대와, 내면의 진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20대에는 그 모습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 주인공은 왜 이렇게 우유부단할까. 그냥 자기 길을 가면 되는데."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반갑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이를 먹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적 역할이 겹겹이 쌓인 지금, 그 질문은 더 절실하다. 나는 누군가의 엄마이자, 누군가의 딸이고, 직장에서는 특정 직함으로 불린다. 이 모든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정작 '나 자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얼마 전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나누다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요즘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애들 키우고, 부모님 모시고, 일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가는데, 정작 내가 뭘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같은 질문을 품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50대의 나에게 <데미안>은 "아직도 답을 찾아도 괜찮다"는 허락처럼 다가온다. 이미 완성된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다시 새로운 선택을 해도 된다고, 삶을 새로 디자인해도 된다고 말해준다.
책 속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길을 가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문장이 지금은 다르게 들린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제라도 내 길을 다시 찾아도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고전의 힘은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질문을 던지되, 각 시기마다 다른 답을 허락한다는 점.
3. <어린 왕자> — 소중한 것을 보는 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어릴 적엔 그저 동화였다. 장미와 여우, 별나라 여행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예쁜 삽화와 짧한 문장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지만, 깊은 울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으니 그 책은 관계와 사랑의 본질을 말하는 철학서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구절은 20대엔 낭만적인 말로만 들렸지만, 지금은 살아온 시간의 무게 속에서 진실로 다가온다.
특히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하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네가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그 장미를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야." 길들인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의미. 20대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이지, 시간을 들여 '만드는' 것이라는 개념이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습관, 부모님의 잔잔한 목소리, 아이가 건네는 짧은 안부. 화려하지 않아도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해온 본질이었다는 것을. 남편이 퇴근길에 사오는 내가 좋아하는 빵, 아들이 전화 끝에 습관처럼 건네는 "사랑해", 여전히 나를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친정 엄마의 "밥은 먹고 다니니?" 라는 짧은 안부. 이런 것들이 쌓여 관계가 되고, 삶이 된다.
어린 왕자가 자기 별의 장미를 그리워하며 하는 말도 이제야 이해된다. "수천 송이의 장미가 있어도, 내 장미는 하나뿐이야. 내가 물을 주고, 바람막이를 쳐주고, 애벌레를 잡아주었으니까." 관계란 선택하고, 돌보고, 시간을 들이는 것. 그 과정에서 평범한 것이 특별해진다.
50대의 내가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건 '돌아봄'이다. 늘 앞만 보며 달려왔던 지난 세월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이미 내 곁에 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보는 일. 그것이 중년 이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다.
4. 고전이 주는 위로, 나의 두 번째 인생을 위하여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 거울이다. 젊을 때는 나를 앞으로 끌어내는 힘이었다면, 지금은 나를 다독이고 다시 길을 그려 주는 지침서다.
<데미안>은 나에게 또 한 번의 변화를 감행할 용기를 주고, <어린 왕자>는 이미 가진 것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두 책이 함께 말해주는 것은 이것이다. 변화와 안정, 도전과 돌봄은 대립하지 않는다. 둘 다 필요하고, 둘 다 가능하다.
50대의 삶은 단순히 하향 곡선이 아니라, 다른 색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두 번째 캔버스다. 젊을 때의 원색 대신 지금은 중간색을 쓸 수 있고, 거친 붓질 대신 섬세한 터치를 더할 수 있다. 실수를 덮어내는 법도, 여백을 두는 법도 이제는 안다.
나는 요즘 작은 독서 노트를 만들고 있다. 매일은 아니어도, 책을 읽고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옮겨 적는다. 그리고 그 문장이 왜 마음에 들었는지, 내 삶의 어떤 순간과 연결되는지 짧게 쓴다. 몇 달 뒤 다시 읽어보면,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이 위로가 되었는지 보일 것이다.
책 한 권의 위로는 이 캔버스에 첫 붓질을 하게 만드는 힘이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하지 않고, 대신 "지금 이 순간, 네가 느끼는 색을 칠해봐"라고 말해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장을 연다. 오래된 문장들이 새로운 의미로 말을 걸어올 때, 나는 나의 인생 2막이 결코 늦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고전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에게 건네는 현재진행형의 위로다.
다음에 읽을 책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정했다. 20대에 읽었을 때는 극한 상황의 기록으로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아마도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50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또 하나의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