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문장을 수백 컷으로 확장하는 일, 이것이 문학의 영상화다. 같은 이야기라도 매체가 달라지면 시점, 인물의 감정선, 심지어 결말의 온도까지 달라진다. 아래 다섯 작품은 한국영화와 넷플릭스 드라마 가운데 ‘원작 대비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볼 만한 대표 사례들이다. 배우와 주인공의 이름을 함께 적고, 이야기 중간중간 인상적인 장면과 대사를 끼워 넣어 독서와 시청의 간격을 좁혀 본다.
1. 시(詩)의 독백을 ‘응시’로 바꾸다 — <은교>
박범신의 원작 소설은 노(老) 시인 이적요(박해일)의 내면 독백이 깊고 길다. 영화는 이 독백을 화면의 ‘응시’로 전환한다. 한 장면, 적요가 한복 입은 한은교(김고은)를 창가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프레임은 정지된 사진처럼 느껴진다. 반면 영화는 그의 제자 서지우(김무열)와 은교 사이의 갈등을 보다 명시적으로 다루며, 세 인물 간의 삼각 관계를 시각적 갈등으로 재구성한다. 예컨대 적요의 문장 하나가 아닌, 은교의 머리칼이 떨어지는 순간, 지우의 카메라 클로즈업이 스토리의 전환을 장식한다.
소설이 언어로 구축한 욕망의 층위는, 영화에선 긴 침묵과 시선의 레이어로 증폭된다. 원작의 여백은 영상의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그 결과 결말의 여운은 보다 선명했고, 관객은 은교를 통해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닌 ‘기억해야 할 것’으로 감정을 바꾸게 된다.
2. 동네의 체온을 바꾼 두 가지 선택 — <완득이>
원작 『완득이』는 가난, 장애, 다문화 가정 등의 소재를 묵직하게 녹여낸 성장소설이다. 영화는 그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일부 설정을 재배열했다. 도완득(유아인)의 어머니 국적이 원작 베트남에서 영화 필리핀으로 바뀌며, 다문화 현실을 더 직접적으로 그려낸다. 또 이동주(김윤석)라는 선생의 캐릭터가 더욱 부각되며, 완득이 주변 인물들의 성장이 함께 그려진다. 강당 장면에서 이동주가 “네가 가진 건 네가 싸울 권리야”라고 짤막히 말하는 장면은, 원작엔 없던 한마디지만 영화의 정서를 대변한다.
영화는 소년의 내면보다 그를 둘러싼 관계망에 더 집중한다. 도완득이 링 위에서 스파링하는 순간보다, 체육관 라커룸에서 이동주와 마주보는 순간이 더 오래 기억된다. 원작이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여정을 그렸다면, 영화는 그 소리가 ‘공간 속 음성’으로 울리는 방식을 택했다.
3. 철로 위에 그린 계급의 도해 — <설국열차>
프랑스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한국 버전으로 재해석되며 독창적 색채를 얻었다. 꼬리칸에서 엔진칸까지의 돌파는 한 컷 한 컷이 계급의 층위를 통과하는 실험이 된다. 남궁민수(송강호)의 리더십과 요나(고아성)의 가능성은 단순한 생존극을 넘어 구조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메이슨(틸다 스윈튼)의 독백이다.
모자는 머리에, 신발은 발에. 나는 모자, 너희는 신발.
이 짧은 문장은 권력의 논리를 날카롭게 정리해낸다.
원작이 사유 중심의 만화라면, 영화는 사건 중심의 서사를 선택했다. 그 대신 캐릭터 감정선과 시각적 상징을 추구했고, 각 칸간 이동의 리듬은 ‘탈출’이 아니라 ‘진격’으로 변화했다. 시청자는 끝에 다다랐을 때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여기 있었나”라는 질문까지 마주한다.
4. ‘사건’보다 ‘사람’을 확장하다 — <D.P.>
웹툰 『D.P 개의 날』은 탈영병을 잡는 군사 경찰 조직의 이야기로 출발한다. 드라마화된 <D.P.>는 그 틀을 유지하면서 인물 수와 심층 서사를 크게 확장했다. 안준호(정해인)은 원작의 행동형 캐릭터에서 “왜”를 묻는 눈빛을 가진 인물로 진화했고, 한호열(구교환)의 조언은 그저 웃긴 대사가 아니라 상처와 연대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2화의 버스 정류장 장면에서는 한호열이 “넌 군복이 너한테 입혀진 거야?”라고 되묻는다. 원작엔 없던 대사지만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의 의미를 확장한다.
원작이 웹툰이라는 매체답게 컷이 빠르고 사건 중심이었다면, 드라마는 컷 사이에 침묵을 넣었다. 조사실 복도, 밤의 벽창호, 벤치 위 피의자—그 공간에서 인물들은 말을 던지기도 뜸해지고, 숨을 쉬기도 머뭇거린다. 독서 후 영상화된 이야기를 접했을 때 우리가 놓치기 쉬운 건 ‘인물 뒤의 빈 자리’였다는 걸 이 작품이 상기시킨다.
5. 괴물을 부르는 마음의 모양 — <스위트홈>
웹툰 원작의 설정—욕망이 괴물화를 촉발한다—을 드라마는 공간과 캐릭터로 폭넓게 확장한다. 차현수(송강)의 내면 독백이 줄어든 대신, 아파트 각 세대의 사연이 입체적으로 부각된다. 현관문, 복도, 계단참이 공포의 연출 공간이자 공동체의 경계선이 된다. 시즌 1 마지막, 현수의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는 걸 자각했어”라는 대사는 원작에는 없었지만 전체 이야기의 톤을 집약하는 문장으로 자리 잡았다.
웹툰이 가진 과감한 상상력은 유지되지만, 드라마는 인물군을 폭넓게 키워 감정의 지분을 나눈다. 그 결과 공포는 더 가까워지고, 희망은 더 어렵게 얻어진다. 독서가 상상 위주였다면 영상은 ‘같이 숨 쉬는 경험’으로 바뀐다.
6. 엔딩 노트 — 원작을 사랑한다면, 각색을 존중하라
소설·그래픽노블·웹툰은 ‘읽는 속도’를 관객에게 맡기지만, 영화·드라마는 ‘보는 속도’를 연출이 설계한다. 그래서 각색은 종종 삭제이고, 덧붙임이며, 재배열이다. 다섯 작품은 그 과정을 성급한 단순화가 아니라 새로운 해석으로 증명한다. 원작이 건넨 질문을 더 많은 눈과 귀 앞에 가져오기 위해, 스크린은 시점을 조정하고 장면을 고른다. 다음엔 책을 먼저, 혹은 영상을 먼저 보고 서로를 겹쳐 읽어 보자.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다른 울림을 내는지, 금세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