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장소다. 벽은 보호막이면서도 경계이고, 문은 안락함의 상징이면서도 감금의 장치가 된다. 영화는 그 미묘한 경계를 통해 인간이 공간에 기대는 방식과, 공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방식을 섬세하게 그려왔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집’을 심리적 무대로 삼은 네 편—《행복한 라짜로》, 《도어락》, 《침입자》, 《디 아더스》—를 중심으로, 가족과 관계, 그리고 공간의 권력 구조를 탐색해 본다.
1. 봉건의 벽과 순수의 거울 — 행복한 라짜로 (2018)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이 작품은 현실과 신화를 교차시키며 ‘공간의 착취’를 보여준다. ‘인비올라타’라는 이름의 고립된 농장에서 귀족 마르케사 알폰시나 데 루나(니콜레타 브라스키)는 농민들을 속여 노예처럼 부린다. 주인공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뇰로)는 순수하고 선량한 청년으로, 그 착함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결함이다. 그는 착취 구조를 의심하지 않고,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의 거짓 유괴극에도 기꺼이 동참한다. ‘집’이라 불리던 농장은 피난처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감옥이다.
영화는 중반 이후 시간을 뛰어넘으며, 도시의 폐공장·지하철·고층 빌딩으로 무대를 옮긴다. 하지만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집은 더 세련된 장치로 인간을 가두고, ‘선한 마음’은 여전히 이용당한다. 탄크레디가 라짜로를 부르는 목소리—
“Lazzaro!”
—는 구원의 신호 같지만 사실은 다시 노동과 복종의 굴레로 불러들이는 주문이다. 로르바케르는 이렇게 말한다. 착한 사람이 사는 집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2. 열쇠 하나로 나뉘는 천국과 지옥 — 도어락 (2018)
이권 감독의 도어락은 현대 도시 여성의 불안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공효진이 연기한 조경민은 은행에서 일하며 오피스텔에서 홀로 산다. 어느 날, 현관문 키패드에 낯선 손이 닿고, 문틈으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가 그녀의 평범한 일상을 깨트린다. ‘집’은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취약한 공간이 된다.
경민이 문 너머로 묻는다.
“누구세요?”
그 대사는 단순한 공포의 외침이 아니다. 자신이 여전히 ‘이 공간의 주인인가’를 확인하려는 절박한 질문이다. 불빛이 꺼지고, 잠금장치가 고장 나며, 문은 점점 더 많은 ‘타인’을 허락한다. 영화 후반부, 경민이 스스로 망치를 들고 싸우는 장면은 ‘안전’을 되찾는 과정이자 ‘집의 주권’을 회복하는 상징이다.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공간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간을 지켜야 한다.
3. 돌아온 피붙이, 낯선 집 — 침입자 (2020)
손원평 감독의 침입자는 가족의 틀 속에서 ‘심리적 침입’을 다룬다. 서진(김무열)은 아내를 잃은 뒤, 어릴 적 실종된 여동생 유진(송지효)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처음엔 감격스럽던 재회가 시간이 갈수록 불안으로 바뀐다. 유진이 가족의 중심으로 스며들면서 집의 온도가 달라지고, 가구의 위치가 바뀌며, 규칙이 낯설게 변한다.
서진이 묻는다.
“유진, 너 맞아?”
피붙이의 이름을 확인하는 행위는 동시에 ‘경계의 선’을 긋는 일이다. 영화는 피를 나눈 가족조차 완전한 신뢰의 피난처가 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과거의 기억과 외부의 침입자, 그리고 죄책감이 뒤섞이는 심리적 감옥으로 변모한다. 결말에 이르면 관객은 알게 된다. 집은 벽이 아니라, 의심과 믿음이 교차하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4. 빛이 닿지 않는 집의 진실 — 디 아더스 (2001)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디 아더스에서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두 아이와 함께 영국의 외딴 저택에 산다. 아이들은 ‘빛 알레르기’로 인해 커튼을 꼭 닫아야 하고, 집 안은 항상 어둡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소리와 문틈의 그림자가 일상을 침범한다. 하녀 미세스 밀즈의 말은 영화의 전환점이 된다.
“Sometimes the world of the living gets mixed up with the world of the dead.”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섞이면서, ‘집’은 양쪽 세계의 통로가 된다.
반전의 순간, 그레이스는 자신과 아이들이 이미 유령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이 지키려던 ‘집’은 사실 다른 가족의 거주지였던 것이다. 피난처로 믿었던 공간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공포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창문을 열고 햇빛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집은 죽음조차 품을 수 있는 기억의 장소로 바뀐다. 집은 결국 ‘머무는 곳’이 아니라 ‘이야기가 남는 곳’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