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작품들은 ‘없는 존재’로 이야기를 굴린다. 화면에 나타나는 유령이든, 말로만 전해지는 망자이든, 혹은 거대한 ‘부재’ 자체이든—사라진 존재는 남겨진 사람들의 말과 선택을 바꾸고, 세계의 규칙까지 다시 쓰게 만든다. 아래 다섯 편은 한국·미국·일본을 넘나들며, 유령이 어떻게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물 이름과 배우, 장면의 호흡을 따라가며 ‘부재의 서사’를 해부해본다.
1.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 — 식스 센스(1999)
심리치료사 말콤 크로우(브루스 윌리스)는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소년 콜 시어(헤일리 조엘 오스먼트)를 만난다. 엘리베이터의 흔들림, 욕실의 냉기, 문틈의 그림자—콜의 세계는 “감각으로 먼저” 움직인다.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I see dead people.”이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은 유령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타자’일지도 모른다는 시선을 얻게 된다. 이 작품은 유령을 ‘공포의 장치’가 아닌 ‘서사적 의뢰인’으로 전환한다. 콜이 사연을 들어주고 미완의 일을 마무리할수록, 유령들은 떠나고 남겨진 자들은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유령의 주인공화는 바로 여기서 성립한다. 유령이 이야기의 목적을 갖는다.
말콤과 콜의 관계는 ‘치료’에서 ‘상호 구조’로 옮겨간다. 콜이 두려움을 감당하며 누군가의 마지막 말을 전달하는 동안, 말콤은 스스로의 생과 사를 직면한다. 유령은 두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진실에 이르게 하는 질문의 형식이다. 이 영화는 ‘유령을 본다’는 초능력을 ‘타인의 고통을 알아본다’는 윤리로 번역한다.
2. 영혼을 집으로 데려오는 의식 — 귀향(2016)
1943년, 정민과 영희—두 소녀가 위안소로 끌려가고,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 돌아온다. 수십 년 후, 노년이 된 생존자는 영매의 의식을 통해 친구의 혼을 ‘집으로 보내려’ 한다. 여기서 유령은 증언의 주체로 선다. 계절이 바뀌고 촛불이 흔들리는 방에서, 죽은 자의 이름은 생존자의 몸을 통해 발화된다. 카메라는 남겨진 이의 팔과 주름, 떨리는 입술을 길게 잡는다. 말문이 트이자 비로소 세계의 시간도 다시 움직인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유령’의 이미지가 공포의 연출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령은 기억을 되돌리고, 공동체가 묻은 시간을 꺼내오게 하는 귀환의 장치다. 영혼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과거의 진실을 현재의 말로 옮기는 일과 같다. 사라진 존재가 이야기의 핵심이 될 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다.
3. 신들의 도시에서 배우는 ‘이름’의 힘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열 살 치히로는 부모와 함께 폐허 같은 터널을 지나 ‘영혼과 요괴의 세계’로 들어간다. 부모는 돼지로 변하고, 그녀는 목욕탕을 운영하는 마녀 유바바 밑에서 이름을 빼앗긴 채 ‘센’으로 일해야 한다. 이곳에서 유령과 신들은 손님이자 노동자이며, 계약의 규칙 아래 서로의 몫을 지킨다. 하쿠, 가오나시, 스스와타리—보이지 않거나 불완전한 존재들은 치히로와 함께 ‘이름을 되찾는 법’을 배운다.
이 영화에서 유령은 고독한 망령이 아니라 공존의 구성원이다. 욕심을 먹어치운 가오나시는 치히로의 배려를 통해 ‘두려운 존재’에서 ‘손님’으로 위치가 바뀐다.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애쓸수록, 사라진 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지도 분명해진다. 유령은 두려움의 타자에서 공동체의 이웃으로 이동한다. 그 이동이야말로 미야자키가 만든 ‘성장’의 정의다.
4. 천을 뒤집어쓴 존재, 시간의 주인공 — A Ghost Story(2017)
교통사고로 죽은 ‘그’(케이시 애플렉)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유령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루니 마라)가 부엌 바닥에서 파이를 먹으며 울음을 삼키는 긴 시퀀스 동안, 유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한다. 창밖의 계절, 낯선 입주민, 철거와 신축—시간은 유령을 중심으로 흐르고, 집은 하나의 거대한 기억 통이 된다. 그는 벽에 남겨진 자필 쪽지를 찾기 위해, 혹은 사랑의 잔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끝없이 그 자리를 맴돈다.
이 영화의 유령은 감정의 해설자가 아니라 시간의 증인이다. 대사가 거의 없는 대신 롱테이크가 감정을 굳힌다. 부재가 길어질수록 존재는 선명해지고, 말이 줄어들수록 공간은 깊어진다. 유령이 주인공이라는 말은, 종종 이런 뜻을 갖는다. 말할 수 없기에 오래 머무르는 존재. 그래서 그의 마지막 시선이 남기는 건 공포가 아니라 기묘한 평온이다.
5. 집 안의 침묵, 가족의 귀신 — 장화, 홍련(2003)
시골 대저택으로 돌아온 자매 수미(임수정)와 수연(문근영), 그리고 새 어머니 은주(염정아). 이 집에는 말로 다하지 못한 과거가 배어 있다. 서랍의 움직임, 옷장 문틈, 복도를 가르는 바람—유령은 곧 진실의 다른 이름이다. 어떤 유령은 실제로 존재하고, 어떤 유령은 죄책감이 만든 그림자다. 이 작품은 ‘누가 보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았는가’를 질문한다.
결말로 가까워질수록 유령은 가족사를 해부하는 메스가 된다. 집은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미해결의 범죄현장으로 바뀌고, 관객은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좁은 틈으로 끌려 들어간다. 유령이 주인공이라는 말은, 이야기의 심장부에 미안함과 애도가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미안함을 끝내 말하지 못하면, 유령은 떠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