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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작은 치유, 점심시간

by bombitai 2025. 9. 25.

친구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모습

1.특별한 하루, 우리들의 약속

“언니, 이번 주 화요일 어때?”

카톡방에 누군가 메시지를 보내면 금세 답장이 이어진다. “좋아!” “나도 괜찮아!”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어때?”

작은아들 초등시절 친구엄마로 만난 우리 네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점심 약속. 이제 50대가 된 우리에게 이 시간은 단순한 식사 모임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각자의 일상은 바쁘다. 누구는 아직 직장을 다니고, 누구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누구는 집에서 가족을 돌본다. 하지만 이 날만큼은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나'로서 만난다. 엄마도, 아내도, 직장인도 아닌 그냥 '나'로서 말이다.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저녁 모임처럼 부담스럽지도 않고, 커피 한 잔으로는 아쉬운 그 애매한 시간. 하지만 바로 그 애매함이 우리에게는 완벽했다. 3시간 정도면 충분히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각자의 오후 일정에도 지장이 없다.

레스토랑을 고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요즘 몸이 무거워서 샐러드 파는 곳으로 가자." "아니야,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아서 오늘은 파스타 먹고 싶어." 메뉴 선택에서부터 우리의 현재 상태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작은 신호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오랜 친구 사이의 미덕이다.

2.겉으로는 안부, 속으로는 속마음

“요즘 어때?”

늘 똑같은 인사로 시작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매번 다르다. 처음에는 가벼운 근황부터 시작한다. 아이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 일 이야기.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안부들이지만, 우리는 그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진짜 메시지를 읽어낸다.

“큰애가 취업 준비하는데 맨날 방에만 있어서 답답해 죽겠어.” 라는 말 속에는 '내가 뭘 더 해줄 수 있을까'하는 조바심이 담겨있다. “남편이 퇴직하고 나서 집에 있으니까 좀 어색해.” 라는 말에는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이 숨어있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는다. 정말로 듣는다. 해결책을 성급하게 제시하지도 않고, 위로의 말로 성의 없이 넘어가지도 않는다. 그냥 들어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점심이 절반쯤 지나면 대화는 더 깊어진다. “요즘 거울 보기가 싫어져.” “나도. 엄마 닮아가는 게 신기하면서도 서글퍼.” “우리 언제 이렇게 늙었지?” 웃으며 하는 말이지만, 그 웃음 속에는 시간의 무게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있다.

때로는 깊은 고민도 털어놓는다. “남편과 대화가 줄어든 것 같아.” “아이들이 독립하면 나는 뭘 하며 살아야 할까.” “이 나이에 새로운 꿈을 꿔도 될까.” 이런 이야기들은 가족에게도 쉽게 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를 지나온, 지나가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3.서로를 향한 따뜻한 이해

“그래, 그럴 수 있어.”

우리 대화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다. 판단하지 않는다. 비교하지 않는다. 그냥 이해한다. 50년을 살아온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깊은 공감이 있다.

누군가 “요즘 화가 자주 나는데 이유를 모르겠어”라고 하면, “갱년기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런 시기일 수도 있어. 나도 그랬거든.”이라고 답한다. 원인을 분석하려 들지 않고, 해결책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냥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서로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예전에는 꼼꼼했던 친구가 요즘 깜빡깜빡하는 것, 항상 밝았던 친구가 가끔 우울해하는 것, 조용했던 친구가 갑자기 수다스러워진 것. 이 모든 변화들을 '나이 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우리 진짜 나이 들었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웃는다. 나이 드는 것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그 과정 자체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가끔은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네기도 한다. “너 요즘 너무 남편 눈치만 보는 것 같아. 네 의견도 말해봐.”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너무 자신을 잃지 마. 너도 중요해.” 하지만 이런 조언들도 강요가 아닌 제안의 형태로 전달된다.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니면 흘려보내도 된다는 여유가 있다.

4.다시 일상으로, 하지만 홀로가 아닌

“오늘 정말 좋았다. 다음 달에 또 만나자.”

점심이 끝나갈 무렵이면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좋았다고, 정말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지만, 마음속에는 따뜻한 무언가가 남는다. 내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 내 감정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한다. 20대에는 친구들과 만나면 주로 연애 이야기, 30대에는 결혼과 육아 이야기, 40대에는 자녀 교육과 부모 부양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50대인 지금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드디어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일까.

오늘 친구들과 나눈 대화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누군가의 고민, 누군가의 걱정, 누군가의 새로운 도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의 소중함.

휴대폰을 보니 단체 카톡방에 메시지가 와있다. "오늘 너무 좋았어. 다들 수고했어!" "나도! 한 달이 또 기다려지네." "다음엔 내가 맛집 알아볼게!"

작은 웃음이 나온다. 그래, 우리에게는 이런 친구들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진짜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인생이 훨씬 든든해진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이 가볍다. 오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들 덕분에 내 마음속 응어리들이 많이 풀린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혼자 고민하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한달중 특별한 하루. 우리만의 작은 치유의 시간. 이 시간이 있어서 나머지 29일도 견딜 수 있다.


진짜 친구란, 서로의 변화를 함께 견디고 받아들이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사람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