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언제부터였을까, 엄마의 키가 유난히 작아 보였던 것은.
얼마 전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던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접수 창구에서 보험증을 찾지 못해 헤매시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아, 이제 내가 챙겨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어린 시절 무엇이든 척척 해결해주시던 든든한 엄마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 옆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어요. 50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찾아온 변화였죠. 엄마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전히 “괜찮다, 괜찮다” 하시는 엄마의 말씀을 믿고 싶었고, 나 역시 아직은 보호받는 딸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엄마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거나, 예전에 잘하시던 요리를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어요.
2.마음의 짐과 함께 찾아온 새로운 책임감
엄마를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한 감정을 동반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동시에 때로는 부담스러움을, 헌신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내 인생도 살고 싶다는 욕구가 교차했어요. 이런 양가감정을 느끼는 것이 죄스럽기도 했지만, 중년 자녀들이 부모 돌봄 과정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와 갈등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특히 어려웠던 것은 엄마의 자존감을 지켜드리면서도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직 멀쩡하다”고 고집하시는 엄마에게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혼자서는 위험한 일들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도와드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이 시기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다른 비슷한 상황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실질적인 해결방안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딸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3.현실적인 돌봄과 나만의 경계선 찾기
어머니 돌봄의 현실은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세세한 일들의 연속이었어요. 병원 스케줄 관리부터 시작해서 약물 복용 체크, 생활안전 점검, 그리고 각종 행정업무까지. 처음에는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고 했지만, 곧 이것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형제자매들과의 역할 분담이었어요. 예전에는 “내가 딸이니까 당연히”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떠안으려 했지만, 이제는 현실적으로 분담하고 전문적인 도움도 적극적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노인 복지에 대해 알아보고, 주변의 도움으로 주간보호센터에 등록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혼자 잘 지낼 수 있다고 센터 가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엄마에게 더 나은 돌봄을 위한 선택임을 설명하고 엄마가 인정하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아주 만족하고 계십니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내 인생도 소중하다는 것, 완벽한 돌봄보다는 지속 가능한 돌봄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만의 경계선을 설정하여 일주일에 몇 번은 나만의 시간을 갖고, 친구들과 만나고,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돌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4.새로운 관계 속에서 찾은 성장과 감사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를 돌보는 과정에서 나 자신도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우리 모녀만의 새로운 유대감도 형성되었어요. 어머니와 함께 옛날 사진을 정리하며 들었던 젊은 시절 이야기들, 어머니가 건네주신 인생 조언들은 이제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어려운 순간들이 있어요. 엄마의 건강이 더 악화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배웠거든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이것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 역시 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 말이에요. 딸에서 보호자로의 변화는 슬픈 일이 아니라, 인생의 자연스러운 순환이자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혹여 지금 비슷한 상황에 계신 분들이 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