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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로 기억되는 영화들 — 향기·비 냄새·담배연기가 남긴 서사의 흔적

by bombitai 2025. 11. 7.
여러가지 향수제품

 

이미지의 예술이라 불리는 영화는 사실 ‘후각의 예술’을 꿈꾼다. 화면 밖으로 흘러나올 수 없는 냄새를 어떻게 관객의 뇌 속에서 불러낼 것인가. 그래서 어떤 영화는 과일 향, 비 냄새, 분장 냄새, 담배연기 같은 감각적 단서를 세심히 배치해 장면을 ‘기억의 서랍’으로 만든다. 아래 네 편은 후각적 기억이 어떻게 사랑·정체성·권력·추억을 움직이는지 보여준다.

1. 여름 과수원의 향, 첫사랑의 온도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2017)

북이탈리아의 한 여름, 17세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아버지의 조교로 온 올리버(아미 해머)를 만난다. 이 영화는 풍광만으로도 향을 떠올리게 한다. 잘 익은 복숭아와 살구, 호수의 물비린내, 뜨거운 돌길과 젖은 수건의 냄새까지—냄새의 기억은 곧 계절의 기억이고, 계절의 기억은 첫사랑의 호흡이 된다.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스며드는 과정은 대사보다 과일과 흙, 젖은 풀의 질감으로 기록된다.

유명한 복숭아 장면은 이 작품의 ‘후각적 클라이맥스’다. 과즙이 손에 번지고 방 안 공기가 달콤해질 때, 관객은 눈으로 냄새를 맡는 독특한 체험을 한다. 올리버가 속삭이는 한 줄,

“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

이 문장은 향수처럼 오래 남는다. 이름을 교환한다는 건 타인의 몸에 자신의 기억을 맡기는 일. 그날의 향은 이후의 모든 계절을 소환하는 암호가 된다. 마지막 벽난로 앞의 롱테이크에서, 우리는 엘리오의 눈물뿐 아니라, 꺼져가는 장작과 겨울 공기의 냄새까지 함께 떠올린다.

2. 분장 냄새와 담배연기, 무대 뒤의 운명 — 패왕별희 (1993)

베이징 경극단의 분장실은 향분과 기름, 오래된 천의 냄새가 뒤엉킨 공간이다. 어린 도우쯔가 성디에이(장국영)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스승의 담뱃대 냄새와 무대 뒤 분장의 향은 훈육과 운명의 상징으로 겹친다. 그는 훈련 중 “나는 본디 사내아이, 여인이 아니오.”라는 대사를 반복해 틀리며 혹독한 벌을 받는다. 냄새는 여기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분장 냄새가 짙어질수록 디에이는 무대의 캐릭터(우희)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점점 분리되기 어려운 지점으로 밀려간다.

샤오러우(장풍의)와의 인연, 주셴(공리)의 존재, 그리고 시대의 폭력 속에서 담배연기는 자주 장면을 덮어쓴다. 연기는 곧 망설임의 기호이자, 말하지 못한 마음의 스모그다. 경극의 북과 징, 옻칠 냄새까지 화면을 통해 전해지는 듯할 때, 관객은 무대 아래의 인물들이 어떤 공기를 들이마시며 살아왔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패왕별희는 후각적 정조를 통해 “역할”이 어떻게 인간을 만들고, 또 부수는지 체감하게 한다.

3. 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한 남자 —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2006)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벤 위쇼)는 냄새만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그는 사람을 향(香)으로 환원하고, 그 향을 채집해 ‘완전한 향수’를 만들려 한다. 살인의 동기는 욕망이나 복수라기보다 순수한—그래서 더 소름끼치는—탐미다. 영화는 비 내린 파리의 흙냄새, 가죽과 땀, 시장의 생선과 허브, 기름과 향신료의 무게를 물씬 풍기게 찍는다. 관객은 화면에서 냄새가 흘러나오지 않음에도, 촉각처럼 생생한 후각의 세계로 끌려간다.

이 작품에서 냄새는 기억을 넘어 권력이다. 향 한 방울이 군중의 윤리와 판단을 전복시키고, 한 사람의 존재를 신격화한다. 그르누이가 마지막 병을 기어이 비울 때, 남는 건 비극의 쾌락이 아니라 ‘감각의 독재’가 불러온 공허다. 냄새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세계가, 냄새로 인해 가장 비인간적인 풍경으로 변해버리는 아이러니.

4. 한 숟갈이 되살린 어린 날의 비 — 라따뚜이 (2007)

미식 비평가 앙토앙 이고가 한 숟갈의 라따뚜이를 입에 넣는 순간, 카메라는 번쩍 과거로 플래시백한다. 젖은 흙과 비 내린 시골 집의 냄새, 흙 묻은 장화, 주방의 따뜻한 증기—그 모든 감각이 “어린 시절 집”으로 곧장 연결된다. 후각은 뇌의 기억 회로와 가장 가까운 감각, 영화는 그 생리학적 사실을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증명한다.

이고가 마지막에 남기는 말,

“Not everyone can become a great artist; but a great artist can come from anywhere.”

는 맛과 냄새의 기억이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지에 대한 선언처럼 들린다. 재능의 출발점은 거창한 곳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었던 작은 냄새—빗물, 스튜, 구운 빵의 향—였다는 깨달음. 라따뚜이는 후각의 회상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회상이라는 사실을, 가장 아름다운 컷으로 기억시킨다.

5. 냄새는 어떻게 서사가 되는가

네 작품은 후각을 네 가지 방식으로 사용한다. ① 정체성의 암호—〈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과일 향처럼, 특정 냄새가 관계의 비밀 열쇠가 될 때. ② 역할의 족쇄—〈패왕별희〉의 분장 냄새와 담배연기처럼, 냄새가 직업·시대·권력을 배경 향으로 새겨 넣을 때. ③ 권력의 장치—〈향수〉처럼, 냄새가 타인의 의지까지 휘두르는 순간. ④ 회복의 장면—〈라따뚜이〉처럼, 냄새가 잊힌 기억을 되살리고 상처를 봉합할 때. 후각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강하게 서사를 움직인다.

 

영화는 냄새를 직접 전달할 수 없기에, 더 정밀한 우회를 선택한다. 손에 번진 과즙, 분장대의 조명, 젖은 도로의 반사광, 김이 서린 유리—보는 것만으로도 ‘맡게’ 만드는 이미지들. 스크린 속 냄새는 결국 관객의 개인적 기억과 만나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장면을 보고도 서로 다른 냄새를 떠올린다. 영화관을 나와서도 한참 동안, 그 냄새는 우리를 따라온다.

후각은 가장 원초적인 타임머신이다. 한 컷의 과일, 한 모금의 스튜, 한 줄기의 담배연기, 빗방울이 스치고 난 뒤의 공기—그 모든 것이 사랑과 상실, 성장과 화해를 소환한다. 다음에 스크린에서 김이 오르는 접시나 젖은 골목을 보게 된다면, 그 장면을 ‘냄새의 기억’으로 저장해 보자. 언젠가 예상치 못한 순간, 그 냄새가 당신의 어느 여름을, 어느 밤을, 어느 무대를 다시 데려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