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는 자극이 아니라 정보다. 스크린 속 괴물·의식·속삭임은 뇌가 위협을 처리하는 방식, 상실을 다루는 기술, 관계의 권력을 드러내는 장치다. 다섯 편의 작품을 통해 ‘왜 무서운가’가 아니라 ‘무서움이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따라가 본다.
1. 최면과 ‘침강’—겟 아웃(Get Out, 2017)
크리스(다니엘 칼루야)는 여자친구의 집에서 장난처럼 시작된 상담이 곧 최면으로 바뀌는 순간, 몸의 통제권을 잃는다. 미시 아미티지(캐서린 키너)의 숟가락이 찻잔을 두드리는 팅-팅 리듬과 함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명령한다.
Now, sink into the floor.
이어지는 단어는 단호하다.
Sink.
화면은 곧 ‘썽큰 플레이스(Sunken Place)’로 가라앉는다. 공포는 초자연이 아니라 통제 상실의 감각에서 발생한다. 눈앞의 현실을 인지하되 개입할 수 없는 상태—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과 유사한 지점이다. 다음 날 아침, 크리스는 데린(릴 렐 하워리)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만, 딘 아미티지(브래들리 휘트퍼드)는 태연히 관계의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한다.
By the way, I would have voted for Obama for a third term, if I could.
이 말은 위협이 ‘친절’의 언어로 위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겟 아웃의 무서움은 피튀김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주체가 조용히 공동화되는 심리과정을 투시하는 데서 나온다.
2. “조금씩 다 미쳐간다”—사이코(Psycho, 1960)
노먼 베이츠(앤서니 퍼킨스)는 마리온(자넷 리)에게 중얼거리듯 말한다.
We all go a little mad sometimes. Haven't you?
공포는 ‘괴물’로부터가 아니라, ‘정상’의 표면이 벗겨질 때 생긴다. 베이츠 모텔의 따뜻한 램프와 새 박제들은 안정을 흉내 내지만, 카메라는 시선의 균열—귓불의 경직, 미소의 굳음—을 오래 잡는다. 심리학적으로 이 장면은 인지 부sonance를 극대화한다. ‘상냥한 청년’ 스키마와 ‘불길한 징후’가 충돌하는 그 미세한 틈에서 관객의 예측 가능성은 붕괴한다. 샤워 시퀀스의 잔혹성보다 더 끈질긴 것은, 그 후 욕실 커튼이 흔들리던 침묵의 길이—불확실성이라는 공포의 본질이다.
3. 상실과 그림자—더 바바둑(The Babadook, 2014)
아멜리아(에시 데이비스)와 아들 새뮤얼(노아 와이즈먼)은 검은 표지의 그림책을 발견한다. 페이지가 넘겨질 때마다 운율이 흐른다.
If it's in a word or it's in a look; You can't get rid of the Babadook.
“말 속에 있어도, 눈빛 속에 있어도—바바둑은 떼어낼 수 없다.” 슬픔은 배제한다고 사라지지 않고, 억압할수록 형태를 바꿔 돌아온다. 영화 후반, 아멜리아는 떨리는 숨을 고르고 결국 외친다.
This is my house!
공포는 제거가 아니라 경계 설정의 레슨을 제공한다. 집의 가장 어두운 방으로 내려가 괴물에게 먹이를 주는 결말은, 상실을 ‘몰아내기’보다 ‘관리하기’로 전환하는 심리적 재구성을 보여준다. 트라우마는 퇴치 대상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 단순하지만 어려운 사실이 바바둑의 진짜 가르침이다.
4. 죄책감과 유전—헤레디터리(Hereditary, 2018)
그레이엄 가족의 식탁은 애도와 침묵으로 굳어 있다. 꿈속 고백처럼, 애니(토니 콜렛)는 아들 피터(알렉스 울프)에게 말한다.
I never wanted to be your mother.
“난 너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어.” 이 문장이 무서운 이유는 초자연 때문이 아니라, 말해선 안 될 감정이 가족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발화되는 순간의 파괴력 때문이다. 헤레디터리는 공포를 ‘악마’에 봉인하지 않는다. 유전·양육·침묵이 만들어낸 내적 균열이 외부의 저주와 맞물릴 때, 집은 신성함을 잃고 의식의 장이 된다. 의자와 모형, 천장과 구석—미술의 배치는 ‘감시받는 느낌’을 확장한다. 심리적 강박이 환경 설계로 시각화될 때, 관객은 스크린 밖 자기 집의 그림자까지 의심하게 된다.
5. 군중 공포와 가족의 응급생존—괴물(The Host, 2006)
한강 둔치에 괴물이 출현하는 순간, 사람들은 같은 방향으로 달리지만 이유는 제각각이다. 방송은 독성 물질·전염 가능성을 말하고, 방역 요원은 비닐막과 손전등으로 공포의 형태를 만든다. 박강두(송강호)는 딸 현서(고아성)를 되찾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동선을 반복한다. 이 영화가 불안한 건 괴물의 외형이 아니라, 군중 심리가 얼마나 빠르게 ‘사실’처럼 굳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의 오열 퍼포먼스, 격리소의 관리방식, 가족이 선택한 비합리적 도피—이 모든 것이 심리학의 감정 전염과 확증편향을 재현한다. 박희봉(변희봉)의 담담한 설명처럼 “사람을 죽인 짐승은 토막내야 한다”는 속설은 이성의 자리를 빼앗은 신념이다. 그 와중에 가족은 임기응변으로 생존 규칙을 만든다. ‘누구 말이 맞는가’보다 ‘누구를 지킬 것인가’가 우선되는 심리—공포는 공동체의 구조를 드러내는 리트머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