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식, 몸을 위한 계산에서 마음을 위한 기억으로
50대에 들어서면서 식탁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 젊었을 때는 음식이 단순히 ‘맛있다, 즐겁다’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늘 ‘건강식’이라는 단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고기를 먹을 때도 기름기를 발라내야 하고, 국을 먹을 때도 염분을 줄여야 하며, 달달한 디저트를 앞에 두고도 칼로리를 먼저 계산한다.
물론 건강을 위한 식습관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음식이 영양소의 조합, 숫자와 지표의 계산으로만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음식이 본래 가진 힘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은 단지 몸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마음을 채우는 위로이자,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2. 추억 속의 맛, 관계로 남은 맛
내게 음식은 늘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저녁 무렵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엌 가득 퍼져 있던 된장국 냄새. 엄마가 “손 씻고 밥 먹어라” 하던 목소리와 함께 떠오른다. 그 된장국은 소금의 함량이나 콩 단백질의 수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가족이 함께 앉아 밥을 먹는 시간, 그 자체가 맛의 본질이었다.
청춘 시절엔 친구들과 나눠 먹던 길거리 떡볶이가 떠오른다. 매콤달콤한 소스에 푹 잠긴 떡과 어묵, 그리고 웃음소리. 우리는 시험에 떨어지고도, 연애에 실패하고도 떡볶이 앞에서 다시 웃었다. 그 맛은 고추장의 매운맛이 아니라, 함께 울고 웃던 청춘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명절 음식들. 기름 냄새로 가득 찬 부엌에서 동생들과 전을 부치며 서로 뒤집다 태우기도 하고, 어른들 잔소리를 피해 몰래 고기 한 점을 집어 먹던 기억이 있다. 건강에 좋으냐 나쁘냐보다, 그 자리에서 흘렀던 웃음과 온기가 더 선명하게 남았다.
지금은 부모님과의 외식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연세가 드신 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앉으면, 음식이 아니라 시간이 귀하다. 부모님이 “이제는 이런 음식은 잘 못 먹겠다” 하시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때의 음식은 영양을 넘어, 소중한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는 도구가 된다.
3. 삶의 위로로서의 음식
50대가 되고 나니 음식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제는 ‘얼마나 건강에 좋은가’보다 ‘이 순간 내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직장에서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따뜻한 라면 한 그릇을 끓여 먹을 때, 그것이 내 몸에는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라면이 내 지친 마음을 달래고, 잠시나마 위로가 된다면 그것 역시 충분히 값진 음식이다.
자녀가 서툰 솜씨로 끓여준 된장찌개도 마찬가지다. 간이 맞지 않아 싱겁고, 두부가 부서져 형태도 엉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릇을 앞에 두고 있으면, 그 음식 속에는 정성과 사랑이 담겨 있음을 안다. 건강식으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삶의 맛’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남편친구들과의 부부모임 자리에서도 그렇다. 한 잔의 막걸리에 부침개를 곁들이며 흘리는 웃음은 영양학적으로 따지면 별 의미 없는 칼로리일지 모르지만,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는 데는 그 어떤 슈퍼푸드보다 강력하다. 음식은 배를 채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마음을 채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4. 건강과 삶의 균형 잡기
물론 건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50대의 몸은 관리가 필요하고, 무심코 먹는 습관이 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삶에서 맛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음식이 의무만 된다면, 하루 세 번의 식사가 고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름의 균형을 찾았다. 하루 세 끼 중 두 끼는 가볍게, 균형 잡힌 영양식으로 먹는다. 하지만 하루 한 끼는 ‘삶의 맛’을 위한 식사로 둔다. 좋아하는 빵집의 단팥빵을 먹기도 하고, 남편과 막걸리 한 잔을 나누기도 한다. 그것은 건강을 해치는 방탕이 아니라, 내 마음을 돌보는 또 다른 건강법이다.
여행지에서 먹는 지역 음식도 그러하다. “기름지고 짜다”며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음식을 함께 나누며 현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은 어떤 영양제도 줄 수 없는 행복이다. 건강과 삶의 맛, 이 둘은 반대가 아니라 균형을 맞춰야 할 두 날개 같다.
5. 음식은 삶을 이어주는 언어
돌아보면, 음식은 늘 내 삶을 이어주는 언어였다. 엄마가 끓여준 국, 친구와 나눈 분식, 부모님과의 외식, 자녀가 차려준 서툰 밥상까지. 영양과 칼로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그 안에 있었다.
사진이나 글로 기록한 것보다, 음식과 함께한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음식에는 냄새와 맛, 온기가 담겨 있어 오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된장국 냄새만 맡아도 엄마의 부엌이 떠오르고, 치킨 한 조각만 먹어도 친구들과 보낸 밤이 되살아난다. 음식은 나를 시간 여행자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매개다.
50대의 내가 선택하는 음식은 이제 건강식만이 아니다. 삶의 위로가 되고, 관계의 기억을 남기고, 마음을 채워주는 음식이야말로 나에게 진짜 건강식이다. 결국 음식은 ‘삶의 맛’을 담는 그릇이다.
앞으로도 나는 숫자와 지표만 보지 않고, 내 마음을 살피며 음식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그 음식이 누군가와 함께 웃고, 떠들고, 추억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바로 50대 이후 내가 지켜야 할 식탁의 원칙이다.